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무언가를 받곤 합니다. 선물을 쉽게 떠올려 볼 수 있겠지요. 어떤 날을 기리거나 좋은 마음으로 전하는 물건 말이죠. 그런 것도 맞겠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거의 모든 건네지거나 주어진 것, 또는 '주어짐'에 가깝습니다. 받는 사람의 의지와도, 주는 이의 의도와도 크게 관계가 없습니다. 반드시 좋은 것이란 보장도 없고요. 심지어는 독과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gift'라는 단어처럼, 몇몇 문화권에선 한 단어가 선물과 독을 동시에 가리키기도 하는 걸 보면요). 어쨌거나 이 '선물'은 우리의 선택과 관계없이 주어졌고, 그러나 분명 우리에게 속하게 되어 심지어 우리에게 응답을 요청하거나 적어도 편안하지 못한 부채감을 남깁니다. 더군다나 건네진 것이 물건이 아니라 감사함, 도움이나 사랑 같은 마음이라 해봅시다. 마찬가지로 전해진 독이 해로운 물질이 아니라, 위해를 가하는 행위나 증오, 편견 같은 거라면 어떨까요? 답례하거나 무시하거나, 아예 복수를 하면 끝나는 것일까요? '보답의 굴레'나 '꼬리를 문 복수'란 말처럼 주어짐-받게 됨-갚음을 통해 생기는 관계는 우리를 속박하고, 또 그 순환에서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결을 조금 달리 얘기해, 예컨대 부모님에게 물려 '받음'을 생각해 봅시다. 양쪽 다 주거나 받으려 의도하지 않았고, 좋든 싫든 간에 나이자 동시에 그들인 것을요. 완전히 되갚아지지도, 또 피하거나 바꾸어 버릴 수 없는 주어짐-받게 됨으로 맺어진 관계 말입니다. 우린 때로 친구, 연인, 심지어는 라이벌이나 적과도 이런 관계를 맺습니다. 때론 잘 모르는 이들과도 어떤 계기를 시작으로, 마침내 이러한 관계로 얽히게 됩니다. '선택적'으로 맺어진 것처럼 보이는 관계 역시나, 어느 순간엔 주어진 것처럼 받아들여지니까요.
물론 모르는 사람과 말이나 얼굴을 한 번 주고받았다 해서 이런 역임이 드러나는 건 아닐 겁니다. 또 지금까지의 말과는 조금 다르게, 우리는 주어짐과 받음의 연속을 쉽게 '초월'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지에 다다르는 걸 얘기하는 건 아니고, 관계를 '건너뛰어' 버리는 것 말입니다. 실제 우리 삶에서 주고 받음의 반복에서 멀어질 수 있는 방법은 많아 보입니다. 가장 일반적인 건, 돈을 지불하는 것으로 관계를 대리하거나 또는 계약으로 명시해서 시작과 끝을 정해 두는 거지요. 어떤 쪽이든 일방적 선택을 내리거나, 또는 합의된 과정에 의해 관계를 놓아 버리는 데 성공하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인지 우리는 정리된 이해 관계들 덕분에 점차 꼭 '필요한', 진짜 '가까운' 혹은 정말 '어쩔 수 없는' 관계만을 남겨 놓은 채, 완전한 타인들에겐 속박되거나 영향 받지 않는 '깔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잠시 우회해,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게 된 이유를 말해 보겠습니다. 실은 이 이야기의 시작이 어떤 주어짐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놓인 김방주의 사물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몇 해 전, 김방주에게는 아버지로부터 집 한 채 분량의 물건들이 주어졌습니다. 생애 동안 아버지가 모은 물건들이었지요. 아버지가 병환에 시달리며, 김방주는 종류도 수량도 어마어마한 사물들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방대한 잡동사니 앞에서 김방주는 일종의 앞도감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그가 '거인 같았다'라는 표현을 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말은 어쩌면 아버지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거대한 덩어리와도 같은 사물들을 향해있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들을 회피하려고도, 또 자신 나름의 규칙으로 다시 정리하며 이해하려고도 시도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모든 주어진 것이 그렇듯, 완전한 거부도 수용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쇠약해져가는 아버지의 신체와 실서를 잃어 가는 사물들을 돌보며, 또 그 초과적인 상황과 시간을 보내는 스스로를 돌보며, 김방주는 주어짐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된 것 같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이 상황을 '받아넘기는' 시간을 보내며 자신이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는, 무수한 관계들을 거쳐 비로소 자신에게 도착한, "그냥 생긴" 일임을 인정하기로 한 셈일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김방주의 이야기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에게 역시 하나의 주어짐이었습니다. 물론 2년전 즈음 전시를 함께하길 권했던 것이 저이기에, 일부분 저로부터 시작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가 종종 어렵사리 건네주는 그의 이야기들은 제가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로부터 다시 전해진 선물이자 독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그가 아버지-자신의 집과 사물을 일부분 전시장으로 들고 들어와 불태우기로 했다 전했을 때, 제게 일말의 당혹감도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입니다. 전시장에서 불을 쓰는 일에 대한 걱정보다도, 매우 사적인 관계에서 발생한 일을 어째서 전시를 통해 내보여야 하는 것인지, 또 왜 그러한 방식으로 '풀어내야' 하는 것인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시작이 다다른 이 시점에도 제가 완벽하게 이해했다고는 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김방주는 전시장에 아버지의 사물들을 다시 풀어 놓습니다. 몇몇은 분해되고 불태워지며, 또 일부는 닦고 정리되어 때때로 건네어질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 사물들, 김방주의 일부와 가까운 거리로 얽힌 관계들이 전시장을 넘어 다른 누군가-어딘가-무엇에게로 향할 지도 모르는 형태로 일종의 주어질 준비를 마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김방주가 적어도 스스로의 일부를 끝내 인정할 수 있게 된 것이고, 그래서 그러한 대상과 관계들을 '돌려' 보내기로 했다고 추측합니다. 다만 그들의 발신지로 곧장 '되돌리는' 것은 아닌 방식으로요. 또 저는 이것이 김방주가 이들로부터 영영 멀어지거나, 관계의 고리를 끊어내는 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관계는 또 다른 주어짐-받게 됨의 연속으로 이어지고 확장되는 셈이지요. 마치 저의 제안이 돌고 돌아 사물과 그들의 이야기로 다시 주어졌듯이, 김방주 스스로에게도 언젠간 되돌아올지도 모르는 방식으로요.
적어도 제가 마침내 '인정하게' 된 것은, 이러한 일이 보여주기의 한 형식으로만 제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당신이 '전시'를 보러 온 선택을 내린 것과는 관계없이, 지금 여기에 이르러 '보게 됨'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일종의 '받게 됨'에 처하게 된다는 차원에서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직접 '선물'을 건네받지 않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펼쳐진 모든 사물, 상황, 이야기는 당신과 직접적 관계가 없고 또 당신의 이해를 초과할지도 모르나, 당신을 향해있으며, 아마 길고 긴 얽힘의 타래를 거쳐 분명 어딘가에서 당신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김방주와의 주고-받음의 관계를 디딘 채, 답신을 받을 수 없는 글로써 이야기를 건네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이 글은 일부분 나로부터 출발해 되돌아온 것을 되갚는 일입니다. 다만 김방주와 그의 아버지, 또는 작가와 나와 같은 좁은 관꼐를 넘어선 경로를 향해 '주고-받음'의 고리를 넓혔을 따름입니다. 이러한 '선물'이 번져 나가며, 우리들 사이에 이미 놓여있었을 희미한 얽힘을 점차 드러내리라 기대하면서요.
"세상이 이미 파산했다는 말이 있다. 세상이 세상에 갚을 수 있는 것보다 큰 빚을 지었고, 이제는 법정 관리에 들어가 팔려야 마땅하단 말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에게 빚지고 있는 이러한 보편적 상태가 우리가 크리스마스나 새해 같은 때마다 겪는,
선물을 주는 일에 대한 어려움을 설명할수 없다고 생각한다. 관대해지기란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만, 빚을 갚는 일은 누구에게나 성가신 법이니까."
- Ralph Waldo Emerson, Gifts: An Essay (Boston: The Pinkham Press, 1923), pp. 5–6.
곽노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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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위 글은 다음과 같은 '선물'들로부터 쓰여질 수 있었음을 밝힙니다. 김방주의 작업을 '비대칭적 증여', '선물'과 연결해 이해하는 관점은 곽영빈 평론가의 글인 <비대칭적 선물을 향한 지표적 충동의 궤적: 김방주 작가론>(김방주 개인전 도록 『사리와 조금』, p. 5~8.)에서 전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증여’의 개념에 대한 이해는 마르셀 모스의 저작 『증여론』(박세진 역, 파이돈, 2025)을 참고하였습니다.